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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운마저 들어메친 ‘왕발’, 일본 자존심 무너뜨렸다

2024.01.14
인물 스포츠
40여 년 전 세계 유도계가 충격에 빠졌다. 1984년 하계 올림픽 유도(95kg 이하 체급)에서 처음 출전한 신예가 강력한 우승 후보들을 잇달아 격파하고 금메달을 차지한 것이다. 특히 유도 종주국 일본 유도계의 자존심엔 큰 ‘금’이 갔다. 당시 세계 1위 미하라 마사토가 8강전에서 상대에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기 때문이다. 파란의 주인공은 바로 한국의 하형주.

한국 유도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기록한 것은 그해 안병근(71kg 이하)과 하형주가 처음이었다. 부산체고를 거쳐 동아대에 재학 중인 22살 부산 청년이 한국 유도의 황금기를 열어젖힌 순간이었다.

하형주의 그 시절 모습을 '투혼'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하형주는 올림픽을 앞두고 크게 다쳤고 노골적인 편파 판정과도 상대해야 했다. 뼈아픈 패배도 경험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내 극복했다. 40여 년 전 그의 이야기가 여전히 감동을 주는 이유다.

하형주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끝으로 국가대표에서 은퇴했다. 모교인 동아대에 교수로 부임해 30년 넘게 스포츠심리학을 연구하고 가르쳤다. 최근에는 국민체육진흥공단 상임감사로 선임돼 침체된 지역 대학 체육부를 활성화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지난달 14일 그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지난달 14일 국민체육진흥공단 하형주 상임감사가 자신의 선수 시절을 회고하고 있다. 정수원·김보경 PD blueskyda2@

■훈련 상대는 구덕산 편백나무

하형주는 1962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체격이 크고 여러 운동을 좋아했다. 진주상고에서 씨름 선수로 이름을 날리던 그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꿈꾸며 종목을 유도로 전향한다. 그는 유도부가 있는 부산체고로 전학을 갔고 곧 두각을 나타냈다. 결국 졸업 전인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앞두고 국가대표로 선발된다. 하지만 냉전의 여파로 대한민국이 불참하면서 첫 출전은 미뤄진다.

유도 특기생으로 동아대에 진학하면서 하형주의 국가대표 경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마땅한 훈련 상대를 찾기 어려웠던 하형주는 학교 인근 구덕산에서 편백나무를 상대로 받다리후리기를 연습하며 기량을 갈고닦는다. 하형주는 1981년부터 각종 세계 대회에 출전해 우수한 성적을 거두면서 한국 유도의 유망주로 떠오른다. 1984년 LA 올림픽을 앞두고 그를 향한 국민들의 기대감은 한껏 고조됐다. 팬들은 신발 크기가 310mm에 달하는 그를 ‘왕발’이라는 별명으로 부르며 응원했다. 하형주의 자신감도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하지만 개막을 40여 일 앞둔 어느 날 그에게 거짓말처럼 불운이 닥친다. 훈련 도중 허리를 크게 다친 것이다. 그는 “올림픽과 인연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참 많이 억울하고 울면서 병원에서 지냈다”고 말했다. 실의에 빠진 채 병원에 누워 있어야 했던 하형주에게 당시 한국선수단 김성집 단장이 찾아와 뜻밖의 소식을 전한다. 바로 하형주가 올림픽 개막식에서 한국선수단 기수로 뽑혔다는 것이다. 믿기 힘든 소식이었다. 보통 올림픽 개막식 기수는 그 국가 선수단 내에서도 금메달 획득이 확실시되는 선수가 맡는데 자신은 출전 자체가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하형주는 자신에 대한 국민들의 큰 격려와 믿음을 느꼈다. 그는 열흘 만에 다시 일어나 매트 위로 복귀할 수 있었고 개막식에서 한 손에 태극기를 번쩍 들고 한국 선수단을 대표하는 기수로 입장한다.


1984년 LA 올림픽 유도(95kg 이하)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하형주가 시상식에서 기뻐하고 있다. 대한체육회 제공

■세계 1위 꺾고 황금기 열다

올림픽 무대에 선 하형주는 거침없이 상대를 제압하며 8강에 진출한다. 상대는 당시 세계 랭킹 1위 일본의 미하라 마사토, 숙명의 한일전이 펼쳐진다. 하형주는 강한 공세를 이어갔고 경기 시작 1분 30여 초가 지났을 무렵 미하라의 빈틈을 파고든다. 어린 시절 익힌 씨름에서 응용한 들어메치기에 미하라의 몸은 그대로 매트 위로 쓰러진다. ‘한판’이 명백했지만, 심판은 ‘절반’을 선언한다. 석연치 않은 판정을 뒤로하고 하형주는 곧이어 미하라를 들어메치기로 완전히 무너뜨린다. 완벽한 기술에도 심판의 판정은 또다시 ‘절반’에 그쳤지만 결국 하형주는 미하라를 꺾는다. 강호와의 대결이라는 중압감 속에서 심판의 판정에 억울함을 느끼고 심리적으로 흔들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오래전부터 상대에 대한 분석을 마친 상태여서 자신만만했다”며 “오히려 한 번 더 쓰러뜨릴 기회를 얻어 두 번 승리를 거둔 셈”이라고 말했다.

8강에서 통쾌한 승리를 거두고 준결승전에 오른 하형주의 몸은 성한 곳이 없었다. 미하라와의 혈전에서 오른팔과 어깨에 심한 상처를 입었고 손톱마저 부러졌다. 4강에서 맞붙은 상대는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서독의 귄터 노이로이터. 하형주는 ‘효과’를 내주며 고전하다가 종료를 30여 초 남기고 가까스로 ‘유효’를 따내며 역전승을 거둔다.

짜릿한 역전으로 결승에 오른 하형주의 마지막 상대는 브라질의 더글라스 비에이라 였다. 하형주는 시종일관 상대를 압도했고 결국 승리를 거두면서 올림픽 첫 금메달을 차지한다. 22살 부산 청년이 세계 유도의 최강자로 등극한 순간이었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스가이 히토시와의 결승전. 부산일보DB

■쓰린 패배, 그리고 재기

1년 뒤 서울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 결승전에서 하형주는 ‘숙명의 라이벌’ 스가이 히토시를 상대한다. 하형주의 우승으로 큰 충격에 빠진 일본이 ‘하형주 자객’으로 출전시킨 선수다. 하형주가 힘을 앞세워 강하게 압박할 때마다 스가이는 부드러운 몸놀림으로 실점을 피한다. 조급함 속에 종료 10여 초를 남기고 달려드는 하형주를 스가이는 빗당겨치기로 무너뜨리며 ‘한판’을 따낸다. 하형주에게 그 날의 패배 이후 1년은 선수 시절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다. 그는 “참 수치스러웠고 내 실력으로 도저히 그 선수를 이길 수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좌절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1년 후 아시안게임에서 스가이와 다시 맞붙을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스가이와 연습을 많이 해본 일본 코치를 초빙해 특훈에 돌입한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그들은 예정된 것처럼 결승전에서 재회한다. 스가이는 여전히 강한 상대였다. 하지만 지난 1년 동안 패배의 원인을 철저히 분석한 하형주는 스가이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었다. 결국 하형주는 모두걸기로 ‘절반’을 따내고 1년 만에 스가이에게 설욕한다. 하형주는 “금메달을 들고 돌아온 숙소에서 그동안의 마음고생이 떠올라 펑펑 울었다”고 말했다.

대회를 앞두고 크게 다쳤을 때, 경기에서 밀릴 때, 강한 상대와 다시 격돌할 때 많은 선수는 자신감과 평정심을 잃고 무너지거나 제 기량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다. 하지만 하형주는 쉽게 흔들리지 않았고 이겨냈다. 그는 그 원동력으로 ‘기본기’와 ‘초심’을 강조한다. 그는 “어려운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초심으로 돌아갈 준비가 돼 있었다”며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고 많은 훈련으로 다진 기본기로 극복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또 그는 현재 부산 유도의 상황을 아쉬워하며 부산 유도의 재기를 바랐다. 한국 유도사에서 일익을 담당했던 부산 유도는 2000년대 들어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특히 대학 유도부의 위기가 두드러진다. 60년 전통의 동아대 유도부는 성적 부진을 이유로 2017년 완전히 간판을 내렸다. 60년대 정삼현(도쿄 유니버시아드대회 은), 70년대 조재기(몬트리올 올림픽 동), 80년대 하형주로 이어지는 걸출한 선수를 배출한 유도부의 해체는 지역 대학 유도의 현주소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현재 부산 지역에서 유도부를 운영하는 대학은 동의대와 동의과학대 2곳뿐이다. 하형주는 “우수 선수를 지역에 유치해 부산 유도가 다시 세계에 이름 떨칠 날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2002 부산아시안게임 개막식에서 계순희와 성화봉송 최종주자로 나선 하형주. 부산일보DB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김동우 기자(friend@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