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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일제 군수공장 방화하려다 착혈 고문 시달린 애국지사 이광우

2024.01.05
인물 사회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은 광복을 맞았다. 국권을 잃은 채 수십 년간 이어진 일본의 식민 통치에서 마침내 벗어난 것이다. 수많은 순국선열의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지만 지역의 독립운동은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부산은 일본 대륙 침략의 발판이 된 곳이다. 그만큼 일제의 침탈에 전방위로 노출됐다. 이에 반발해 항일 운동을 펼친 애국지사가 부산에도 여럿 있다. 범일동 출신 독립운동가 이광우도 그중 한 명이다. 그는 일제 군수공장인 조선방직에 불을 지르려다 붙잡혀 끔찍한 착혈 고문을 당했다. 광복 후 잊혀 가던 그는 아들의 10년 넘는 끈질긴 노력 끝에 마침내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받게 된다.


부산항일학생의거(노다이 사건)을 그린 삽화. 부산일보DB

■‘노다이 사건’이 부른 항일 정신

이광우는 1925년 3월 19일 경상남도 부산부 범일정(현 부산 동구 범일동)에서 태어났다. 3남 2녀 중 차남인 그는 부산진시장에서 미곡 상점을 운영한 부모 아래에서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던 중 1940년 16살이 된 이광우의 항일 정신을 틔운 일이 발생한다. 바로 부산항일학생의거, 일명 ‘노다이 사건’이다.

부산항일학생의거는 일제강점기 중 부산에서 학생 주도로 펼쳐진 최대 규모의 항일 운동이다. 일제는 1940년 11월 23일 부산공설운동장에서 부산·마산·진주 지역의 중학생을 모아 일종의 군사훈련인 체육대회를 열었다. 하지만 심판인 노다이 일본 육군 대령이 편파 판정을 반복하며 조선인 학교 대신 일본인 학교가 우승하게 된다. 격분한 학생들은 시내에서 시위행진을 벌이고 노다이의 관사를 습격했다.

이 사건을 보며 이광우는 ‘나보다 어린 학생들도 일본에 맞서는데 의거에 동참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힌다. 그로부터 1년 뒤, 그는 부산진공립보통학교(현 부산진초등학교) 동창생 5명과 함께 비밀 결사 조직 ‘친우회’를 결성한다.


이광우의 17살 당시 모습. 동구문화원 이상국 전문위원 제공

■일제 군수공장 방화 시도

친우회는 처음에 항일 전단지를 뿌리는 활동을 벌였다. 가장 먼저 1942년 6월 조선방식 안에 있는 조선인 기숙사에 잠입해 전단 80여 장을 살포한다. 일본 회사에서 일하는 조선인 노동자를 선동하기 위함이었다. 전단에는 한자로 ‘일본은 반드시 망한다’ ‘조선 독립 만세’라고 썼다.

이어 1942년 9월에는 부산어시장(현 롯데백화점 광복점), 같은 해 12월 부산진시장에 전단을 뿌렸다. 1943년 1월에는 조선과 일본을 오가던 배 안 물품에도 전단을 넣었다.

일제의 눈을 피해 항일 전단 살포를 이어가던 친우회는 점차 자신감이 붙는다. 이에 전단을 처음 살포한 곳이자 일제 군수공장인 조선방직을 방화할 계획을 세운다. 조선방직은 1917년 일본 미쓰이 그룹이 부산 동구 범일동에 세운 방직 공장으로 당시 군복 등 일본 군부대 보급품을 만들었다.

하지만 경찰은 친우회의 방화 계획을 사전에 알아챘고, 1943년 3월 7일 이광우 등 3명이 체포되며 방화 계획은 미수에 그치고 만다.


이광우가 조직한 비밀결사 '친우회'에서 뿌린 전단. '일본은 반드시 망한다, 대한 독립 만세'가 쓰여있다. 동구문화원 이상국 전문위원 제공

■10개월간 이어진 착혈 고문

친우회 총책으로서 이광우는 10개월 동안 끔찍한 고문을 견뎌야 했다. 경찰은 같은 시기 울산에서 체포된 사회주의 연맹과 친우회를 연관시켜 사건의 규모를 키우려 했다. 일본 경찰은 친우회에 거짓 증언을 받아내기 위해 고문 강도를 높였다. 이때 고문을 주도한 건 친일 경찰 하판락이었다.

이 위원은 “하판락이 벌인 고문 중 가장 악랄한 것은 바로 ‘착혈 고문’인데, 주사기를 피의자의 몸에 꽂아 피를 잔뜩 뽑아낸 뒤, 이를 피의자 몸이나 벽에 뿌려댔다”며 “아버지는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내 순서를 기다리며 다른 이가 고문당하는 것을 지켜보는 게 더 끔찍했다’고 회고했다”고 전했다.

더불어 야구방망이를 무릎 뒤에 넣은 뒤 강제로 무릎을 꿇게 해 관절과 근육을 끊어내는 고문도 당했다. 이광우는 이 고문의 후유증으로 평생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했다. 모진 고문 끝에 이광우는 징역 3년 형을 받았고, 옥고를 치르다 2년 5개월 만인 1945년 8월 18일 해방을 맞으며 석방됐다.


이광우가 독립유공자 행사에 참여한 모습. 동구문화원 이상국 전문위원 제공

■부친 대신 착혈귀를 쫓다

하지만 이광우는 광복 후에도 오랫동안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다. 1949년 8월 24일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에서 증인으로 소환된 하판락을 만났지만 같은 해 10월 반민특위는 해산된다. 오랜 시간이 지나며 이광우의 독립운동 기록도 영영 묻히는 듯했다.

상황이 바뀐 건 1989년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신청 공고를 이 위원이 발견하면서다. 이 위원은 아버지 이광우를 독립유공자로 신청하고자 했지만 증거가 없었다. 김천소년형무소, 부산형무소 어디서도 판결문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증거 자료 불충분으로 유공자 신청이 유보되자, 그때부터 이 위원은 주말도 반납한 채 아버지의 독립운동을 증명하기 위해 뛰어다녔다.

이 위원은 뜻밖에 <부산일보>에서 그 흔적을 찾아낸다. 1997년 ‘어버이날 포상 대상자 명단’에서 아버지를 고문한 친일 경찰 하판락의 주소를 찾아낸 것이다. 이 위원은 직접 하판락을 찾아 고문 증언을 받아냈고 마침내 10년 만에 부친의 독립운동을 증명해 낸다. 이광우는 200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고 2007년 3월 26일 세상을 떠났다.


이광우가 수감 시절 착용했던 명찰 모습. 동구문화원 이상국 전문위원 제공

이 위원은 “아버지는 생일이 두 번 있었다. 원래 생일은 3월인데, 광복절인 8월 15일만 되면 커다란 카스텔라를 집에 가져와 가족에게 나눠주며 ‘오늘은 내 생일’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항일과 애국정신이 남달랐던 것”이라며 “국가 유공자가 되려면 스스로 공적을 입증해야 하는 탓에 알려지지 않은 분들도 많다. 부산에도 나라를 위해 제 한 몸 던진 독립운동가가 많았다는 걸 시민들이 꼭 기억했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이상배 기자(sangbae@busan.com)
남형욱 기자(thoth@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