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변방국' 편견을 메치다…대한민국 최초 올림픽 금 양정모
2024.01.05
인물
대한민국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전 레슬링 국가대표 양정모 선수. 이정·임지수PD luce@
■ 프로레슬링에 빠진 소년
1953년 2월 부산 대청동에서 태어난 양정모.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어릴 때부터 지는 걸 몹시 싫어했다. 강한 승부욕은 유도 선수였던 부친의 영향이 컸다. 자연스럽게 투기 종목에도 관심이 높았다. 1960년대 당시 국내에는 ‘프로레슬링’이 유행했다. 화려한 기술과 박진감 넘치는 전개는 소년들에게 큰 인기였다. 양정모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프로레슬링에 빠져 자주 경기장에 갔다”며 “나도 링 위에서 프로레슬링을 하면 어떨까 자주 생각했다”고 말했다. 마음은 컸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프로레슬링 선수에 비해 작은 키와 체격은 큰 벽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양정모는 용두산 공원에 놀러 갔다 우연히 한일체육관에서 훈련을 하는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들을 만나게 된다. 그는 “가만히 구경하고 있으니까, 체격이 작은 사람도 있고, 재미있어 보이더라”며 “잘만하면 좋은 대학도 갈 수 있고, 올림픽 출전도 가능하다고 하니 호기심이 동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중학교 2학년이었던 양정모는 레슬링에 입문하게 된다.
1976년 8월 1일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결승리그에서 미국의 존 데이비스를 물리친 양정모의 모습. 부산일보DB
■ 천재 아닌 노력파 레슬러
‘중간에 포기하려면, 시작도 말라’ 부친의 응원 아래 양정모는 레슬링 선수로서 두각을 보인다. 1970년 고3 재학시절 전국체전에 나가 자유형과 그레코로만형 모두 석권하게 된다. 다음 해 일본 도쿄에서 열린 세계 주니어선수권대회에서는 자유형 은메달, 그레코로만형에서는 동메달을 따낸다. 자유형과 그레코로만형 모두 만능이었다는 말. ‘생각하는 사자’ ‘승부에 강한 두뇌파 레슬러’ 등의 별명이 따라다녔다. 그는 “100전 100승이란 있을 수 없다”며 “상대를 끝까지 관찰하고 분석해 적재적소에 기술을 넣어 제압하는 게 특기 아닌 특기”라고 말했다. 양정모는 타고난 재능에 노력까지 겸비한 레슬러였다.
그의 목표는 당연히 올림픽 진출이었다. 그리고 1972년은 뮌헨 올림픽이 열렸다. 도쿄에서 보인 양정모의 실력은 국가대표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끝내 뮌헨행 비행기에는 타지 못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지금처럼 대규모 선수단을 파견할 경제적 여유가 없고, 레슬링은 메달을 따기 힘들다고 판단해 선수단을 줄이게 된 것이다. 그는 “올림픽만 보고 훈련했는데 어린 마음에 허탈감이 컸다”며 “한동안 운동을 쉬다 오정룡 감독님의 설득으로 방황의 시간을 끝낼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1976년 8월 1일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경기장, 태극기가 가장 높게 올라갔고 애국가가 울려퍼졌다. 부산일보DB
■ 금메달 영광의 순간
매트로 복귀한 양정모는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숙명의 라이벌 몽골의 오이도프와 결승전을 펼친다. 오이도프는 그해 터키 세계선수권대회 챔피언이었던 선수. 양정모가 밀린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아무도 그에게 금메달을 기대한 사람이 없었다.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으니, 승부욕이 더 강하게 발동했다. 세계 챔피언은 지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냐, 한번 해보자는 마음을 먹게 됐다”고 했다. 승부는 마지막 3회전까지 팽팽하게 이어졌다. 그리고 1분여를 남겨두고 방심한 오이도프를 몰아붙인 양정모. 오이도프를 테이크다운 시키며 9:8로 승리하게 된다. 한국레슬링이 아시안게임 출전 24년 만에 금메달을 따게 되는 순간이다. 첫 대결은 양정모가 이겼지만, 1975년 선수권대회에서는 오이도프가 승리한다. 둘의 스코어는 1:1. 라이벌의 마지막 대결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결승에서 치러진다.
당시 레슬링의 경기 방식은 지금과는 달랐다. 각 3분 3회전을 치렀고, 벌점제를 도입해 벌점이 가장 적은 선수가 우승하는 방식이었다. 폴승(상대의 양어깨가 매트에 1초 동안 닿게 할 경우)하면 무벌점, 판정승 1벌점, 판정패 3벌점, 폴패하면 4벌점을 받는 식이다. 결승까지 경기를 치르며 양정모는 무벌점, 오이도프는 3벌점인 상태에서 맞붙게 된다. 사실상 양정모가 폴패만 하지 않는다면 금메달을 따는 셈. 양정모는 “경기 방식에 따라 우승을 위해 오이도프는 적극적인 공세를 펼쳤다”며 “폴승을 하려는 오이도프에게 점수를 지키는 전략적 접근이 필요한 경기였다”고 했다. 치열한 승부는 결국 10대 8로 오이도프가 판정승하게 된다. 양정모는 판정패 당하며 벌점 3점을 받았고, 오이도프는 판정승하고도 벌점 1점을 받아 최종 벌점 4점으로 경기를 마무리하게 된다. 비록 승부에선 졌지만, 금메달은 양정모 선수의 차지였다.
1976년 8월 1일, 이 날은 대한민국 건국 이후 첫 올림픽 금메달을 딴 역사적인 날이다. 1936년 베를린에서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시상대에 오른 지 40년 만의 일이었고, 1948년 런던올림픽에 첫 출전 28년 만의 값진 결실이었다. 올림픽 경기장에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양정모는 “경기에 이기고도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애국가를 듣자 울컥하더라”면서 “‘끝까지 하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킬 수 있어서 기뻤다”고 말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양정모가 획득한 대한민국 최초의 금메달. 부산일보DB
■부산을 다시 레슬링 성지로
양정모의 금메달 획득 이후 우리나라 체육의 위상은 한 단계 성장한다. 올림픽 등 국제대회 메달리스트에게 체육연금(경기력향상 연구연금)제도가 확립됐고, 양정모 선수를 청와대로 불러 축하를 전한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한국체육대학교가 설립되었다. 또 양정모는 예술체육요원으로 선정되어 체육인 가운데 최초로 병역특례를 받기도 한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서 우리나라가 보이콧을 선언하면서 양정모 선수도 은퇴를 결심하게 된다. 이후 양정모는 지도자의 길로 들어선다. 1980년부터 88년까지 한국조폐공사 레슬링팀에서 트레이너, 코치, 감독을 차례로 역임한다. 2012년에는 런던올림픽 레슬링특별대책위원장으로 활약하기도 한다. 현재는 부산에서 생활하며 재능기부 나눔 공동체 '희망나무커뮤니티' 이사장 등 레슬링의 부흥을 위해 애쓰고 있다. 그는 “내가 고등학교 시절만 해도 부산은 전국체전에서 단체전에서만 3번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레슬링이 강한 도시였다”며 “그때 당시에 비해 선수자원이 많이 부족한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비인기 종목에 대한 관심 부족으로 선수층이 얇아져 경쟁력도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린이도 가능한 ‘밴드 레슬링(스티커 떼기)’ 등 시민들에게 레슬링을 친숙하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며 “정부나 지자체가 비인기 종목에 대한 지원을 확대해 부산이 다시 레슬링 성지가 되도록 힘써 달라”고 주문했다.
한편 <부산피디아>의 기획 기사와 다큐멘터리 영상을 모은 인터랙티브 페이지가 11월 말 공개될 예정이다. 최동원, 이태석 등 부산의 대표 인물부터 광안대교, 부신시민공원 등 랜드마크의 역사까지 부산의 모든 것을 총정리해 이용자들이 보기 쉽게 정리했다.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남형욱·이상배 기자 thoth@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