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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하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쓸려 나갔죠”

2024.01.05
사회
비행기는 비교적 안전한 교통수단이다. 국제항공운송협회에 따르면 2017년 기준 항공기가 추락 사고가 날 확률은 0.000032%, 한 사람이 비행기를 10만 번 탑승하면 3.2회의 확률로 사고가 난다는 말이다. 그러나 비행기 특성상 사고가 나면 대형 참사로 이어져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린다. 2002년 월드컵 개최를 한 달여 앞둔 시점, 김해 돗대산에 비행기가 추락했다. 탑승객 166명 중 129명이 사망했고 생존자는 고작 37명.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최악의 항공 참사. 비행기는 왜 떨어졌을까. 추락 당시 상황은 어땠을까. 생존자들은 어떻게 살아왔을까. ‘김해 돗대산 중국 국제항공공사 129편 추락사고’의 생존자 설익수 씨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비행기 추락’의 이유

2002년 4월 15일 11시 20분께. 중국 베이징과 부산을 오가는 중국국제항공공사 소속 129편 보잉-767 비행기가 김해공항에 착륙하기 위해 접근한다. 김해공항은 바람의 방향에 따라 착륙하는 활주로가 다르다. 북풍, 즉 북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남쪽 활주로에 착륙하고 남쪽에서 불어오는 남풍이 불면 북쪽 활주로로 착륙한다. 비행기는 뒷바람이 아닌 맞바람을 맞으며 착륙해야 안전하기 때문이다. 그날도 김해공항엔 남풍이 불었다. 북쪽 활주로에 착륙하려면 비행기는 김해공항 활주로를 오른쪽에 두고 평행하게 비행하다 착륙지점을 향해 시계방향으로 180도 틀어서 착륙해야 한다. ‘선회접근’이라고 불리는 착륙법이다. 동시에 고도도 점차 낮춰야 한다. 활주로 북쪽에는 신어산, 돗대산 등 장애물이 있어 회전이 몇 초만 늦어도 위험한 상황에 빠지기 때문이다.



설 씨는 사업차 중국으로 출장을 갔다 귀국하는 길이었다. 그는 “당시 김해공항엔 비가 내리고 있었고 안개가 자욱했다”며 “비행기가 한두 번 크게 출렁거렸지만, 별 탈 없이 착륙할 거라고 믿었다”며 20년도 더 지난 일을 어제처럼 떠올렸다. 김해공항엔 초속 8미터 수준의 강한 남풍도 불고 있었다. 착륙에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상황. 그러나 당시 129편의 기장은 김해공항에 선회접근을 해본 경험이 없었다. 항공기사고조사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운항 승무원들은 대형항공기의 선회접근 착륙기상 최저치를 숙지하지 못했다. 착륙기상 최저치는 시정거리나 활주로 가시 범위 등 착륙이 가능한 기상 상황을 수치로 나타낸 것이다. 거기다 김해공항의 선회접근 시 최대 속도인 140노트를 초과해 비행했다. 결국 활주로를 시야에서 놓쳐버린 운항승무원들은 다시 착륙을 위해 재상승하는 ‘복행’을 하지도 않았고 항공기는 바람에 밀려 돗대산 204m 지점에 추락하고 만다. ‘최악의 조건’과 ‘미숙한 비행’이 참사로 이어진 것이다.



■ 온몸 던져 승객을 구했다

가장 먼저 항공기 우측 날개가 산과 부딪혀 날아갔다. 설 씨는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충격이 곧 몸을 덮쳤고, 앞 사람 뒤통수가 내려다 보일 정도로 기체가 앞으로 기울었다”며 “객실이 종이처럼 찢어지며 흙과 나무가 기내를 휩쓸었고 사람들 몸뚱이도 함께 쓸려 나갔다”며 당시 상황을 전했다. 미끄러지던 기체가 멈추자 정신을 차린 설 씨는 찢긴 비행기 틈으로 서둘러 기어 나왔다. 코끝에 휘발유 냄새가 스쳤기 때문이다. 그는 “항공유가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어서 폭발하기 전 나가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했다”고 했다.



밖은 아비규환이었다. 사방에 사람과 비행기 잔해가 널브러져 있었다. 몸에 불이 붙은 사람들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고 여기저기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설 씨의 머릿속에 함께 비행기를 타고 온 일행들이 떠올랐다. 그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비행기로 다시 들어갔다. 설 씨는 “정신 잃은 사람은 뺨을 때려 일으켜 세웠고, 걷지 못하는 사람은 둘러매고 밖으로 나왔다”고 했다. 설 씨는 산 중턱 한 무덤 근처로 승객들을 모았다. 비로 사람들의 체온이 차갑게 식어갔고 추락한 곳을 모르는 상황에서 돌아다니는 건 위험하다는 판단이었다. 설 씨는 “허리띠를 풀어 사람들을 지혈했고, 임산부에겐 점퍼와 옷을 주면서 구조대가 올 때까지 함께 버텼다”며 “비행기 잔해를 두세 바퀴 돌며 사람들을 수습하고 있었는데 폭발음과 함께 기체에 불이 붙었다”고 말했다. 사고 사망자에 대한 부검 결과, 기도 내 그을음이 발견된 경우가 16건으로 나타났다. 이 말은 사망자가 화재 당시 생존해 있었음을 의미한다. 설 씨는 “기내에서 빨리 탈출할 수만 있었으면, 생존자는 더 많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 막막했던 시간

설 씨의 영웅적인 면모는 전 세계에 알려져, 그해 미국 타임지 선정 ‘아시아의 20대 영웅’으로 뽑혔다. 그러나 끔찍한 추락 사고의 후유증은 10년 넘도록 그를 괴롭혔다. 다니던 직장을 잃고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지냈다. 수면제 없이는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설 씨는 “매 순간 죽음의 위협을 느끼며 불안에 빠져 살았고, 생활 리듬이 깨져 일상을 유지하기 힘들었다”며 “한 살배기 딸을 키워야 하는 한 집안의 가장이었지만 하는 사업마다 다 망했다”고 막막했던 시기를 떠올렸다.

사고 생존자라는 낙인도 설 씨를 괴롭혔다. ‘보상금 많이 챙겼겠네’라는 손가락질이다. 그러나 8년간의 긴 소송전 끝에 일부 생존자와 유족들이 받은 배상금은 최대 1억 5000만 원에 불과했다. 당시 법원은 일반 교통사고와 같은 수준으로 항공사고 위자료를 책정했기 때문이다. 설 씨는 “성형수술을 2번이나 할 정도로 얼굴이 많이 망가졌었고 몸 한쪽에 마비가 오기도 했지만, 목숨을 잃은 이들이 많아 아프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가 사고의 트라우마를 이겨낸 버팀목은 시간이었다. 설 씨는 “끔찍한 사고를 억지로 이겨내 보려고 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며 “가족을 위해 일에 집중하다 보니 세월이 흘렀고, 이제야 사고에 대해 입을 열 수 있게 됐다”고 했다.



■ 끝나지 않은 사고

여전히 김해공항은 위험하다. 2002년과 같은 비슷한 상황은 반복된다. 지난달 10일에도 베트남 나트랑을 출발해 김해에 도착한 진에어 비행기도 선회접근을 실시하다 바람에 밀려 돗대산에 가깝게 붙어 회전한 후 착륙했다. 20여년 전 악몽을 떠올리게 하는 위험천만한 순간이었다. 국토교통부가 발행하는 AIP(항공정보간행물)에는 ‘김해공항은 비상 상황을 제외하고 모든 항공기는 소음 방지를 위해 남해고속도로 북쪽으로 비행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고 적혀있다. 소음 방지를 이유로 들었지만 돗대산과 신어산 등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안전한 공항을 원한다’는 명료한 당위성을 가진 지역의 요구는 대통령이 5번 바뀌고 나서야 본격화되고 있다. 바로 가덕신공항의 건설이다. 가덕도 섬 위를 걸친 육·해상 매립 방식으로 지어지는 이 공항은 24시간 운영되며 관광물류 산업 활성화는 물론 남부권의 상생발전과 국가 균형발전을 이끌게 된다. 무엇보다 공항 주변에 돗대산 같은 큰 장애물이 없어 안전성이 뛰어나다. 지난달 설계비와 보상비, 공사 착수비 등 명목으로 5363억 원이 내년도 예산안에 반영됐고 2029년 개항을 위해 사업이 진행 중이다.



설 씨는 “안전한 공항이 지어지기 전까지 ’김해 돗대산 추락사고’는 여전히 마무리되지 않은 사고라고 생각한다”며 “유골 하나 건지지 못한 사람이 많고, 20년이 지났지만 슬퍼서 사고 현장을 직접 찾아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김해 돗대산에 비행기가 추락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이 기억해 줬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남형욱 기자(thoth@busan.com)
이상배 기자(sangba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