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광안대교는 언제 무너져요?… 조창국 전 광안대로 건설사업소장
2024.01.05
인터뷰
사회
■ 광안대교를 짓다
"광안대교는 원시인이 만든 다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부산의 제일 긴 다리라고 해봐야 경간장(교각 사이의 거리)이 60m에 불과했죠. 주탑 간의 거리만 500m인 광안대교는 당시 기술력으로는 엄청난 도전을 한 셈입니다."
1994년 12월 착공해 2003년 1월 6일 개통한 총사업비 7899억 원, 현재 화폐가치로 1조 5천 억이 투입된 대형 프로젝트. 수영구 남천동 49호 광장에서 해운대구 우동 센텀시티를 잇는 총 길이 7420m의 국내 최초 복층 해상 교량이자 국내 최장 현수교. 광안대교 건설 사업은 국내 최초, 최장이라는 수식어를 모두 달고 다녔다.
조 씨는 광안대교 외에도 부산항대교, 남항대교 등 부산의 굵직한 도시 개발 사업을 이끌었다. 광안대교와 부산항대교는 닮았지만, 현수교와 사장교라는 차이점이 있다. 사장교는 주탑에서 사선으로 뻗은 케이블이 바로 교량을 연결하는 형태고, 현수교는 주탑에서 주탑으로 케이블이 연결되고 그 케이블에 보조 케이블을 연결해 교량을 매다는 방식이다.
"처음에 현수교로 할지, 사장교로 지을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미국의 골든 게이트 브릿지와 브루클린 브릿지, 일본의 레인보우 브릿지를 보고 많은 깨달음을 얻었었죠. 북항과 달리 광안대교는 주거지역과 가까웠는데. 바다에서 보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는 광안리해수욕장과 역시 마찬가지로 곡선이 황령산, 금정산 등 직선적이고 딱딱한 사장교 대신 현수교를 짓는 게 훨씬 더 어울렸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반대한 광안대교. 현재는 부산의 랜드마크가 됐다. 조창국 제공.
■ 전부 반대한 다리
광안대교 건설이 시작되자 반대 여론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왜 땅을 두고 굳이 바다에 지으려고 하느냐, 비용이 많이 드는 현수교가 웬 말이냐, 지어본 적 있느냐, 광활한 광안리 앞바다 조망을 가로지르는 흉물이라는 등 논란은 계속됐다. 수천억 원에 달하는 건설비와 긴 공사 기간도 반발을 키우는 데 한몫했다. 건설 현장과 가장 가까이에 붙은 아파트인 삼익비치 주민들의 반대가 가장 심했다.
"사람들이 엄청나게 반대했습니다. 공무원들은 돈이 많이 든다며 반대했고, 대학교수들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사업이라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환경오염, 건설공해 집값 떨어진다며 다 반대를 했죠. 멱살잡이는 예사고 사무실까지 찾아와 난동을 부렸습니다. 집 대문에 오물을 던지고 가는 사람도 있었죠. 우리 와이프도 좀 조용하게 살자고, 광안대교 짓지 말자고 말렸습니다. 딱 한 사람 김영환 시장만 찬성했죠. 당시 부산시 1년 예산의 3배가 넘는 사업을 승인해 줬는데 큰 힘이 됐습니다."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광안대교가 필요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해운대신도시 때문이다. 1987년 노태우 대통령은 주택 200만 호 건립 정책 일환으로 진행된 해운대신시가지. 문제는 도로였다. 왕복 4차로에 불과했던 수영로로는 늘어나는 교통량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수영로 확장, 고가도로, 해변도로 아무것도 대안이 되지 못했다.
광안대교의 상판은 남천동 방향이다. 건설 당시 마린시티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현수교 주탑과 함께 남천동을 바라보는 게 더 적절했다. 부산일보DB
"광안대교는 해운대신도시를 위해 지어진 다리죠. 남천동과 해운대신도시를 10분 생활권으로 묶는다면, 잠재적 미래 가치가 수천억 원이 넘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사실 4차로 콘크리트 다리가 될 뻔한 위기도 있었습니다. 왜 8차선 다리가 필요한지 수십 번의 설명회를 거쳤고, 끝까지 반대한 시의원들은 집까지 자료를 들고 찾아가 한 사람씩 설득했습니다. 해운대신도시 성공을 위한 진입로 개념으로 접근했다면 그 정도만 해도 충분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부산의 미래를 위해 조금 더 멀리 생각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당시 육군 비행장으로 쓰인 수영비행장, 벌판이었던 수영만매립지, 개발의 여지가 있는 기장군 등 미래를 생각한다면 왕복 4차로 콘크리트 다리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광안대교 건설은 부산의 고질적인 교통난을 해결할 비책이기도 했다. 광안대교를 시작으로 해운대에서 명지, 녹산 공단까지 연결되는 부산 해안순환도로 밑그림이 그려지게 된 것이다.
조 씨는 "부산항대교와 남항대교를 통해 도심을 관통하지 않는 해상다리를 연결하고, 낙동강을 횡단하는 명지대교를 통해 동·서부산 모두 경부고속도로와 소통할 수 있게 되는 해안순환도로의 핵심이 광안대교"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녹 없이 새하얀 광안대교의 비밀은 특수 페인트에 있다. 조창국 제공.
■ 혼을 담은 랜드마크
광안대교와 에펠탑. 두 건축물 모두 '쇠'로 지어졌다. 지난해 에펠탑 표면의 90%가 벗겨져 철골 6300t이 부식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져 충격을 줬다. 파리시는 20여 차례 페인트 덧칠 작업으로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광안대교는 괜찮을까? 도심 한가운데 있는 에펠탑보다 바다 위에 있는 광안대교가 더 녹에 더 취약할 것 같은데. 134년 된 에펠탑과 이제 막 건설된 지 20여 년이 지난 광안대교를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광안대교의 기대 수명은 얼마나 될까?
"광안대교는 미국의 골든게이트 브릿지보다 오래 갈 겁니다. 200년 이상 유지될 것 입니다. 광안대교는 그야말로 혼을 갈아 넣어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수많은 반대 위에 건설되는 다리인 만큼 '앞일을 내다보지 못한 졸작'이라는 평가를 받기가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광안대교에는 미국 나사가 개발한 인공위성 전용 부식방지 페인트 'IC531'을 썼는데, 이 페인트는 쇠의 표면에만 발리는 게 아니라 철판 0.2mm 깊이까지 침투해 부착되어 녹이 스는 걸 최대한 방지해 줍니다."
일반 페인트에 비해 두 배 이상 비쌌지만 부산의 랜드마크를 만들기 위한 당연한 투자였다. 이 특수 페인트를 바르기 위해선 모래를 이용해 철판을 벗겨내는 '샌드블라스트' 공법이 필수적이었다. 현대의 건설 현장에선 흔히 사용되지만 당시엔 이 또한 혁신 중 하나였다.
"페인트를 사용하기 힘들다며 사무실로 하청업체 관계자들이 찾아왔습니다. 너무 쉽게 페인트가 일어난다는 이유였죠. 단순히 철솔 같은 걸로 표면을 문지르기만 하고 발랐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사전 작업으로 제대로 하지 않으면 시공되지 않는 페인트죠. 까다로운 공법 덕에 부실시공을 원천적으로 방지할 수 있었죠."
1995년 1월, 광안대교 착공 한 달 뒤 일본에서 고베 대지진이 발생한다. 만약 부산 앞바다에 이와 같은 지진이 발생하면 광안대교는 어떻게 될까. 조 씨는 "일본으로 가서 참사 현장을 두 눈으로 보고 왔다. 대지진 이후 광안대교의 내진설계를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며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내진설계를 실시한 다리는 광안대교가 최초라며 광안대교의 다릿발은 해저 밑 바위 속 1.5m 깊이에 박혀있다. 진도 9의 강진이 와도 끄떡없다"고 주장했다.
캐나다 웨스턴 온타리오 대학에서 진행한 풍동실험.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조창국 씨. 조창국 제공.
지진뿐만 아니라 태풍에도 안전하다. 바다 위에 건설된 교량은 당연히 바람에 취약할 수밖에 없지만, 광안대교는 평균풍속 45m, 최대풍속 78m를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2003년 한반도를 강타했던 태풍 매미로 광안리 등 해안가는 큰 피해를 받았지만 광안대교만은 멀쩡했다. 비결은 설계 당시 '풍동실험'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터널 모양의 구멍 안에서 설정된 조건에 따라 바람을 발생시킨 뒤 지형, 건축물의 모형을 제작해 피해 정도를 점검하는 실험이다. 건축물에 그것도 다리 건설에 풍동실험을 접목한 것은 광안대교가 국내 최초다.
"재난에 대비한 설계로 유명한 일본에도 풍동실험을 진행하는 곳은 없었습니다. 수소문 끝에 캐나다 웨스턴 온타리오 대학교에서 풍동 실험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광안대교에 적용했죠. 상·하층으로 설계해 트러스교로 만든 것도 바람에 더 잘 견디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왕복 8차선의 다리를 만들 수도 있었지만, 2층으로 만드는 게 출렁거림을 더 줄일 수 있죠."
■광안대교는 미완성
태풍과 지진을 견디고 녹도 슬지 않는 광안대교. 하지만 단점은 있다. 바로 출퇴근길과 주말 극심한 교통 정체다. 광안대교 상판 용당램프로 빠지는 차들로 1·2차로는 주차장이다. 5km 정도 정체가 이어지는데 3차로에서 끼어드는 차들로 종종 시비도 붙곤 한다. 하판도 상황은 비슷하다. 센텀시티, 해운대로 빠지는 차들로 3·4차로는 엉망이다.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하지만 당초 광안대교는 이 모든 교통 수요를 다 감당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바로 '광안대교 2단계 계획'이다. 이 계획에 따르면 광안대교는 지금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광안대교 2단계 계획은 남천동 삼익비치아파트 앞 곡선 구간에서 갈라져 용호만을 지나, 이기대공원 밑으로 터널을 파 감만동에 있는 부산항대교까지 연결되는 4차선 우회도로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설계, 시공까지 마친 이 계획이 갑자기 백지가 된 게 너무 아쉽죠. 2단계 계획이 실현됐다면 용당램프에 다다르기 전 감만동, 영도로 가는 교통량을 미리 분산시켜 광안대교의 정체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동그란 원안에 표시된 부분이 광안대교 2단계 계획의 흔적이다. 분기점을 만들려다 중단되어 있는 모습. 부산일보DB
2단계 계획의 흔적은 여전히 광안대교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바리케이드로 가로막혀 쉽게 알아챌 수 없지만, 분기점을 만들려다 갑자기 도로가 끊긴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상하판 합쳐 약 3000㎡ 면적의 공간이 유휴공간으로 방치되고 있는 셈. 한때 이 공간에 번지점프대를 설치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2단계 계획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신선대지하차도와 광안대교를 연결하거나 해안도로를 내는 방법이 있죠. 지금 광안대교는 반쪽짜리입니다. 빨리 제 모습을 찾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교통정체를 해소하려는 시도는 계속되어 왔다. 지난 2017년 남구청은 광안대교와 이기대공원로를 연결하는 해상도로 신설을 부산시에 건의했다. 당시 부산시는 "용호 부두와 용호만 매립부두 위를 지나는 연결도로는 유람선 운항에 제약을 줄 수 있고 안전사고 위험이 크다"며 반대했다. 2019년 광안대교와 러시아 화물선의 충돌사고를 계기로 용호부두는 폐쇄됐다.
■막내아들 같은 광안대교
'다이아몬드브릿지'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는 광안대교의 조명 덕이다. 초기 설계에 포함되어 있던 것 어두운 바다 위 광안대교의 야경은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관광 상품이다.
광안대교를 배경으로 개최되는 부산불꽃축제. 100만 명의 관람객이 방문하는 이 축제도 광안대교 덕분에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불꽃축제는 광안대교를 적극 활용한다. 현수교 양쪽 두 곳의 앵커블록은 레이저쇼를 위한 스케치북이 되고, 광안대교 아래로 쏟아지는 '폭포수 불꽃'은 매년 불꽃축제의 하이라이트다. 아름다운 광안대교에 웅장하고 화려한 불꽃까지 펼쳐지니, 다른 어떤 곳에서도 볼 수 없는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광안대교를 상시적인 '관광코스'로 활용하자는 의견도 있다. 지금은 걷기대회나 마라톤 등 스포츠 이벤트의 일환으로 상판을 개방하지만, 상시적으로 산책로로 이용할 수 있게 만들자는 말이다. 사실 광안대교 설계 당시 보도 이용이 검토되기는 했다. 조 씨는 "안전이 제일 중요하다"며 "8km가 넘는 다리인데, 산책로로 이용하다가 어떤 돌발 상황이 생길지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사람들로부터 흉물이라는 손가락질을 받다, 현재는 박수갈채를 받는 광안대교. 단순한 다리를 넘어 부산의 대표 랜드마크가 됐다. 수많은 역경을 뚫고 광안대교를 탄생시킨 조창국 씨에게는 그 의미는 남다르다.
"기술 공무원으로 일하며, 이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공사를 성공적으로 해냈다는 보람이 매우 큽니다. 힘든 일도 많았지만 지나고 보니 참 영광스러운 일이자 행복한 일이죠. 솔직히 말하면 볼 때마다 새롭고 자랑스럽습니다. 입에 발린 소리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광안대교는 막내 아들같죠. 광안대교를 아껴주는 부산시민에게 너무 감사할 따름입니다."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남형욱 기자(thoth@busan.com)이상배 기자(sangbae@busan.com)